짧은 생각들(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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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동아.
호동아. 사랑하는 호동아. 아프지만 말고 지내달라고 글을 쓴게 올해 초인데, 형이 너가 아플 때 면밀히 챙기지 못했어. 형이 조금이라도 일찍 병원에 데려갔더라면 우리 동이는 형 무릎에서 골골거리고 있을지 몰라. 그 생각에 나는 너무 괴로워. 나는 평생을 후회할거야.. 형은 아직 너 생각만 하면 눈물 흘리며 꺽꺽거리게 되어서 아직 정돈된 글은 쓸 수가 없어. 그치만 형은 너를 많이 사랑했단다. 너가 나의 친구였고 형제였고 행복이었고 낙이었다. 내 옆에 차갑게 누워있는 너는 내일 장례식장에서 고운 분골이 되어 돌아오겠지만 형은 언제나 너를 사랑하고 기억할거야. 사랑해 호동아.
2021.10.11 -
샴푸를 보다가
0. 샴푸를 보다가 옛날 생각을 했다. 1. 저번 주에는 미용실에 갔다. 올해 초에 펌을 하고 머리를 길러 보겠다고 했었는데, 머리가 턱선 가까이 오는 정도가 되자 견디지 못하고 미용실에 갔다. 종종 다듬으면서 기르긴 했었는데, (길 때는 심지어 묶을 수도 있었다) 답답하고 불편해서 버틸 수 없었다. 올해 들어 계속 가던 미용실이 거리가 꽤 있어 (왕복 한시간 반) 동네에서 새로운 미용실을 개척하기로 했다. 아.. 두피가 안 좋다는 이야기를 30분 내내 듣고 (덕분에 두피 마사지를 서비스로 해 주시긴 했지만) 두피가 안좋으니 머리는 기르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판결까지 듣게 되었다. (샴푸도 사라고 계속 그러시고!) 민감성 두피 + 아토피 + 지루성 피부염이 오래 전부터 있어서 좋은 편은 아니긴 한데.. ..
2021.09.29 -
뒤쳐지는, 그런 느낌
그 이야기를 처음 접한 것은 학부 1학년 때였나, 그때 즈음일 것이다. 사회학 강의를 들으러 갔었는데, 선생님은 루이스 캐럴의 이야기를 해 주었다. 이외에도, 라는 작품이 있다고. 그리고 그 이야기 속의 어떤 세계는, 전속력으로 걸어야만 제자리에 있게 되는 그런 세계라고. 선생님은 한국 사회가 그런 사회가 아닐까 싶다고, 가볍게 말씀하시고 수업 내용으로 다시 넘어가셨다. 알고 보면 꽤 유명한 이야기였지만, 이런저런 상황에 가져다 붙이기 참 좋은 이야기기는 하다. 요즘 내가 그렇다. 나는 여러 가지 일들로, 그리고 약간의 무기력증으로 조금 천천히 걷고 있는데, 그렇게 되니 꽤 뒤쳐지고 만다. 연구자가 된 이후에, 직장인 친구들로부터 뒤쳐지는 것에는 익숙해져 버렸다. 친구들은 돈을 모으고, 결혼을 하고, 아..
2021.08.15 -
근황 21.08.12
근황. 0. 요즘은 글이 나오지 않는다. 문장을 만들어낼 수 있는 역량은 각자에게 한정되어 있을텐데, 요즘은 논문에 쉽게 소진해버리고 있다. 그렇다고 논문을 하루에 몇 페이지씩 쓰는 것도 아닌데. 점점 텍스트 하나하나에 들어가는 에너지가 커지는 느낌이다. 결국 글로 밥벌이 해야 하는 운명인데 한 글자 한 글자가 버겁다. 연구실에 왔는데 공부가 안 되는 김에, 오랜만에 적어본다. 1. 논문 근황 대학원생의 근황에는 특별한 것이 없다. 잘 써지지 않는 논문을 어거지로 붙잡고 하나하나 적어내는 것이다. 사실 글 쓰는 것 자체는 그렇게 힘겹지 않은데, 여러 자료들을 읽고 정리하고 글에 유기적으로 집어넣는 작업이 어렵다. 논문이란 이전의 수 많은 연구성과들 위에 (혹은 옆에) 내 것 하나를 올려놓는 것일텐데, 쉽..
2021.08.12 -
할머니가 되지 못한
어제는 오랜만에 파주에 갔다. 요즈음 친가 사정이 좋지 않아 친척들이 돌아가며 할머니와 할아버지 케어를 맡고 있다. 최근 건강이 악화되신 할아버지는 병원에 입원하시게 되었고, 홀로 계시게 된 할머니께는 근접한 돌봄이 필요한 상황이다. 우리 가족에서는 일단 아버지가 일주일에 두 번, 1박을 하고 오시는데, 직장일과 병행하니 빠르게 소진되는 것처럼 보였다. 할머니도 뵐 겸, 아버지에게 휴식을 드릴 겸, 그리고 유사한 연구를 하는 이로서 돌봄의 책임을 함께 나누기 위해, 홀로 파주로 향했다. 이제는 손주도 잘 알아보시지 못하시는, 식사는 잘 하시나 점점 말라가시는 할머니에 대한 심란함, 돌봄의 개인화에 대한 생각, 돌봄노동에 대한 현실감. ‘건강하게 오래 사세요’라는 말이 공허할 정도로, 할머니의 어려움과 돌..
2021.04.20 -
나는 좋은 연구자가 될 수 있을까?
나는 좋은 연구자가 될 수 있을까? 그만한 능력이 있는 걸까? 잘 모르겠다. 박사 학위를 받고 할 수 있는 다른 일이 뭐가 있을까 종종 생각한다.
2021.03.26 -
건강하게만 자라다오
"건강하게만 자라다오" 상투적인 표현이다. 보통은, 어린 아이를 키우는 부모가 아이에게 바람을 섞어 하는 이야기이다. 종종 부모가 아닌 다른 어른이 아이에게 사용하기도 한다. 이 표현은 두 가지 의미를 그 안에 품고 있다. 하나는, 정말로 '건강'이 삶에 있어 중요하다는 것이다. 건강이 없으면 다른 아무 것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없다. 부모가 아이에게 바라는 학업적 성취나, 자아 실현이나, 추상적인 의미에서 '자녀의 행복' 모두, 건강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매우 어려운 것이 된다. 둘째는, 기대의 최소치로서의 건강이다. 아이에게는 여러 가지를 바랄 수 있다. 아니, 바라게 된다. 열 달을 품고, 그보다 오랜 시간을 함께 길러 탄생한 아이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기는 어렵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모든 바람..
2021.02.19 -
원생에게는 작은 성취들이 필요하다
원생에게는 작은 성취들이 필요하다. 대학원생이란 직업은 (노동과 급여가 존재하지 않아 엄밀한 의미에서 직업이라고 보기에는 어렵지만) 먼 미래의 성취를 바라보며 하는 일이다. 2013년 9월에 석사과정을 시작한 나는 어느덧 8년이 다 되어가는 동안 대학원에 몸담고 있다. 미래는 어떻게 될지 몰라도, 지금 마음에 있는 일을 하겠다는 20대 중반의 포부는 어느덧 현실감에 차츰 물들어 버리고, 내가 하는 일이 정말 의미가 있는 일일까? 하고 한없이 묻게 되는 가련한 영혼이 되었다. 고개를 돌리면, 어떤 친구는 결혼해 아이의 부모가 되고, 어떤 친구는 인정받는 작가가 되고, 또 다른 친구는 미국으로 유학을 가 빠르게 교수 임용에 성공했다. 그저 평범한 대학원생인 나는 그 사이에서 자꾸만 조금씩 작아지는 것이다. ..
2021.02.14 -
2020의 마지막 날.
2020이란 해는 뭔가 특별한 해가 될 것 같았다. 약간의 강박증 때문이다. 횡단보도 흰 선을 밟아가며 건너고, 딱 떨어지는 숫자들을 좋아하는 내게 2020은 뭔가 아름다운 숫자처럼 보였다. 앞의 두 숫자와 뒤의 두 숫자가 반복되면서도 깔끔하게 딱 정돈된 느낌의 해. 그것이 2019년 말에 내가 갖고 있던 막연한 기대였다. 정말 '모두에게' 불행한 한 해가 될 줄은 몰랐다. 코로나 때문에 많은 제약이 생겼다. 코로나가 망가트린 일상을 하나하나 설명하는 것은 이미 많은 이들이 하고 있을테니, 굳이 반복하고 싶지 않다. 코로나 시대에 '잃은' 것이 많지 않다는 것은 감사할 일이다. 건강이든, 돈이든, 일이든(대학원생은 돈벌이 자체가 많지는 않지만. 물론 돈이 되지 않는 일은 많다). 가끔은 몇년 전 진로 고..
2020.12.31 -
페북을 접는 것이 정신건강에 좋겠다.
지난 주 (아니 일요일이니 이번주인가?) 수능이 있었다. 수능이 끝났다는 것은 입시논술 파이널 시즌이 시작되었다는 뜻이다. 이 시즌에 대학원생들은 소소한 용돈 혹은 생활비를 벌기 위해 삼삼오오 논술학원으로 향한다. 아이들의 답안을 첨삭해주는 단기 알바를 하기 위해서다. 나도 몇년 째 그래 왔고, 올해도 그랬다. 다만 올해는 코로나 여파로, 강의도, 첨삭도 온라인으로 행해졌다. 나는 아이들이 메일로 답안을 보내기를 기다렸다가, 몇 가지 포인트를 짚어주고 조언을 달아 다시 보낸다. 짧은 격려의 문구도 더해서. 오프라인 수업일 때에는 아이들에게 궁금한 것을 물어보고 최대한 도움이 되는 이야기를 해주려 하는데, 온라인이다보니 만남의 깊이와 시간이 너무 얄팍하다. 집에서 작업을 하다 보니 종종 무심코 페이스북을 ..
2020.1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