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하게만 자라다오

2021. 2. 19. 02:42짧은 생각들

 

"건강하게만 자라다오"

 

상투적인 표현이다. 보통은, 어린 아이를 키우는 부모가 아이에게 바람을 섞어 하는 이야기이다. 종종 부모가 아닌 다른 어른이 아이에게 사용하기도 한다. 

 

이 표현은 두 가지 의미를 그 안에 품고 있다. 하나는, 정말로 '건강'이 삶에 있어 중요하다는 것이다. 건강이 없으면 다른 아무 것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없다. 부모가 아이에게 바라는 학업적 성취나, 자아 실현이나, 추상적인 의미에서 '자녀의 행복' 모두, 건강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매우 어려운 것이 된다. 둘째는, 기대의 최소치로서의 건강이다. 아이에게는 여러 가지를 바랄 수 있다. 아니, 바라게 된다. 열 달을 품고, 그보다 오랜 시간을 함께 길러 탄생한 아이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기는 어렵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모든 바람이 충족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기대가 많을수록 실망이, 고통이 커질 것이라는 것도 안다. 그래서 우리는 기대를 최소화함으로써 종종 자신을, 그리고 자신이 포함된 관계를 보호하려고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건강하게만 자라다오"라는 말은, 다른 것은 안 바랄테니, 이 정도만 해달라는 요청이기도 하다.

 

부쩍 건강이 중요하다는 것을 체감하는 요즘이다. 지난 해 이맘때 쯤에는 건강검진 결과가 몹시 안좋아서, 콜레스테롤과 혈압, 요산, 혈당 등이 겁나 다이어트에 열중했다. 7-8 킬로 정도를 빼고, 수치는 (정상은 아니지만) 꽤 좋아졌다. 한동안 피검사를 하지 않았는데, 슬슬 한 번 더 검사를 받을 때가 되었다. 허리와 목 디스크도 있다. 찜질기와 자세교정밴드, 스트레칭 등은 하루를 살아가는데 필수 아이템이 되었다. 어린 시절 심했던 아토피는 아직 두피나 얼굴에 조금씩 남아 있고, 석사논문과 포켓몬 고로 얻어진 손목통증도 여전하다. 당연히, 체력도 그리 좋지 못하고, 몸은 적은 근육과 다량의 지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실, 어린 시절부터 그리 건강하지 않았다. 아토피가 꽤 심했었다. 초등학교 입학 이전에는 허벅지나 팔 접히는 부분에 아토피가 심해 병원을 다녔고, 초등학교 입학과 더불어 (비만이 시작되었으나) 잠시 사라졌으나 중학생 때 다시 생겼다. 이 때부터는 얼굴이 문제였다. 손을 묶고 자도 얼굴이나 팔을 긁어 피와 진물이 났다. 너무 심해서 한 번은 얼굴이 피딱지 범벅이 되었는데, 지하철에 타니 몇몇 사람들이 놀란 눈으로 보고는 했다. 비싼 값의 한약을 먹고, 피부에 생소한 약들을 바르고, 어쩌면 대학 입시가 끝나서, 대학에 오니 다행히도 거의 벗어날 수 있었다. 아직 얼굴에는 조금 남아서 울긋불긋하긴 하지만.

 

어린 시절에는 엄마 아빠에게 미안한 감정보다는 짜증을 많이 냈다. 내가 왜 이렇게 고통스럽게 살아야 하지? 엄마 아빠는 왜 나를 치료해주지 못하지? 라는 생각이 온 몸을 긁을 때마다 튀어나왔다. 엄마와 아빠의 마음이 어떨지 알고는 있었으나, 나는 그 마음까지 사랑하지 못했다. 철 없는 시절이었다. 

 

엄마는 나를 30살에 낳으셨는데, 지금의 나는 어느덧 34살이나 되었다. 아이를 갖는 친구들이 많아지고, 차츰 카톡 플필이 누군가를 닮은 아이로 변해가는 요즘, 나는 그때의 엄마와 아빠가 어떤 감정이었을지 조금은 상상할 수 있게 되었다. 아토피 환자의 부모는 자신의 몸이 대신 가려웠으면 한다고, 그런 생각을 많이 한다고 한다. (다른 병을 가진 아이의 부모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는 엄마의 그 마음을 다시 전해줄 수가 없다. 엄마 품에 안기면서, 그때는 괴로웠지만 엄마가 있어서 이렇게 좋아졌다고, 고맙다고 이야기할 기회가 없다. 셋이 살게 되면서 시간을 쪼개 아빠에게 맛있는 음식을 종종 해주는 것은, 조금은 이런 마음 때문이다.

 

"건강하게만 자라다오"라는 말, 나는 그 바람을 들어드리지 못했다. 물론 다른 병들과 마찬가지로, 아이가 타고 나는 아픔은 아이의 탓일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엄마에게 돌려드리지 못하는 부채가 있어서, 지키지 못한 약속에 종종 괴로운 마음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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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전에 침대에 있는 냥이를 품에 안고, 무심코 "건강하게만 자라다오"하고 내뱉고는, 다시 자리에 앉아 쓴다. (이미 10살인 우리 호동이는 사실 이미 다 자라서, "건강하게만 지내다오"가 더 적절하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