샴푸를 보다가

2021. 9. 29. 03:16짧은 생각들

0.

 

샴푸를 보다가

옛날 생각을 했다.

 

 

1.

 

저번 주에는 미용실에 갔다.

올해 초에 펌을 하고 머리를 길러 보겠다고 했었는데, 머리가 턱선 가까이 오는 정도가 되자 견디지 못하고 미용실에 갔다. 종종 다듬으면서 기르긴 했었는데, (길 때는 심지어 묶을 수도 있었다) 답답하고 불편해서 버틸 수 없었다. 

 

올해 들어 계속 가던 미용실이 거리가 꽤 있어 (왕복 한시간 반) 동네에서 새로운 미용실을 개척하기로 했다. 

 

아..

두피가 안 좋다는 이야기를 30분 내내 듣고 (덕분에 두피 마사지를 서비스로 해 주시긴 했지만) 

두피가 안좋으니 머리는 기르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판결까지 듣게 되었다.

(샴푸도 사라고 계속 그러시고!)

민감성 두피 + 아토피 + 지루성 피부염이 오래 전부터 있어서 좋은 편은 아니긴 한데.. 최근 몇년간 크게 호전되었어서

조금 충격이 왔다. (방치하면 탈모도 올 수 있다고 하셨다)

쓰던 샴푸에 너무 적응해버렸나? 해서 새로운 샴푸를 검색해보기로 했다.

 

 

2. 

 

어릴 때부터 아토피를 달고 살던 사람에게 샴푸를 고르는 것은 매우 어렵다. 다행히 팔, 허벅지, 얼굴에 있던 아토피는 거의 사라졌지만 (얼굴에는 컨디션 안좋으면 조금 빼꼼 하기도 하고, 홍조가 자주 있는 편이다) 두피에는 아직 남아 있어서, 신중하게 고를 필요가 있다. 대학원생 혹은 현대인이면 달고 산다는 지루성 두피도 피하지 못했다.

 

석사 입학 전후로 인생샴푸?를 찾았는데, 아발론 오가닉스의 비오틴 샴푸를 직구해서 썼었다. 거의 6-7년 썼는데, 나의 두피는 아발론 전과 후로 나뉜다고 할 정도로, 많은 효과를 보았다. 그래도 환절기나, 스트레스가 심한 기간에는 여지없이 심해지기는 했었다. 그 이후로 다른 샴푸를 테스트해보기도 했는데, 가렵거나 뾰루지가 나고 해서 다시 돌아갔었다.

 

요즘은 천연 샴푸나 유해물질을 최소화한 샴푸들이 많아서 예전보다 선택지가 많아졌다. 동시에, 정보가 너무 많아서 선택은 더 어려워진 것 같기도 하다. 인터넷에는 광고글들도 많고, 두피는 사람마다 제각각 달라서 상반되는 리뷰들도 많다.

 

이것저것 찾아보다가, 아토피 카페 글들을 보게 되었다.

 

 

3. 

 

아이의 아토피를 상담하는 글들이 쏟아졌다. 아토피에 좋은 것들을 공유하고, 나쁜 것들도 공유하고. 약간의 차도에도 기뻐하는, 그런 공간이었다.

 

엄마 생각을 했다.

 

아토피는 다섯살 때부터인가 생겼는데, 초등학교 다닐 때에는 잠잠해졌다가 중학교 3학년때 다시 심해지기 시작했다. 제일 괴로웠던 것은 고등학교 시절이다. 팔이 두꺼워져서 잘 굽혀지지 않았고, 얼굴은 진물과 피딱지로 범벅이 되었다. 밤마다 긁어댔고 아침이면 괴로웠다. 머리 속도 그랬고, 탈모도 왔었다. 고등학교 때 1년 정도 반강제로 채식을 하게 된 것도 그 때문이다. (물론 윤리적 관심도 있었다) 얼굴 아토피가 너무 심해서 서울 한의원으로 가는 날, 만원 지하철에서 내 얼굴을 본 사람들의 표정이 아직 잊혀지지 않는다.

 

지옥이라고 생각했다. 어찌저찌 공부는 열심히 했고 (그때는 공부가 매우 재미있었지.....) 좋은 대학에 갔지만, 입시보다 더 괴로운 것이 아토피였다. 드러나는 질병이란 자존감을 매우 갉아먹는 것이다. 거기다가 육체적 고통 또한 동반되었다. 인간관계도 어려워졌다.

 

그러나 엄마에게는 더더욱 지옥이었을 것이다. 아토피 자녀를 둔 어머니들은 차라리 본인이 대신 겪었으면 하고 바란다는 이야기가 있다. 어린 자녀가 겪는 고통을 보면서 무력함과 고통, 극심한 스트레스를 겪는 것이 아토피 자녀를 둔 부모의 운명이다. 40대 초반의 엄마는 얼마나 속이 상했을까. 자면서 긁지 말라고 아들의 손을 소파 다리에 묶었을 때, 어떤 심정이었을까. 나는 가늠할 길이 없다.

 

사랑하는 만큼 고통도 크다는 것은 신을 의심하게 만드는 하나의 현실이다. 엄마는 나를, 그리고 동생을 많이 사랑하셨고, 그래서 더 큰 고통을 받으셔야 했다.

 

대학에 가고 나서 다행히 아토피 증상은 거의 사라지고, 약 부작용으로 얼굴 피부는 망가져버렸지만, 나는 일상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과음하거나 밤을 새거나, 안 맞는 화장품을 쓰거나 하면 빼꼼 나오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 기쁨을 엄마와 그리 오래 누리지는 못했다.

 

 

4. 

 

두피 아토피는 그렇게 엄청 심하지 않으면 다른 이들에게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가려움이나 진물이나 피부의 발진으로 상태를 감지할 수 있다. 두피 아토피는 내게는 나를 괴롭히는 나의 적이기도 하지만, 내 지난 시절들을 상기해주는 어떤 동반자기이도 하다. 아마 피부가 아주 건강했다면 잊었을 그러한 기억들을 상기시키는.

 

 

5.

 

그래도 너무 괴롭지 않은 두피를 원한다.

 

세 가지 샴푸를 주문했다. 이 중에 잘 맞는 것이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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