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일이라는 '일'

2019. 1. 15. 00:45짧은 생각들

(얼마 전 AP 사진전으로 향하다 만난 냥이. 글 내용과는 관련없다.)






0. 학기 중에는 바쁘다는 핑계로, 그리고 실제로 학업에 조교일까지 수행해야 하는 나로서는 집에 오기 전 이미 지쳐 있기 때문에 가사일을 동생에게 내맡겨 버리고는 한다. 백수...보다는 취준생인 동생은 세탁기를 돌린다든지 쌀을 씻어 밥솥을 누른다든지 아주 기초적인 것들만 하지만 고맙게도 다른 불평 없이 일들 맡아준다 . (그래서 사실 동생의 노고에도 불구하고 집이 학기 중에는 어느 정도 방치된 상태로 있는 것도 사실이다.) 나는 학기 중에 누적된 동생에 대한 부채를 종강 이후에 씻어내고자 했고, 방학이 들어서자 비로소 가삿일을 전담하는 가족 구성원이 되었다.




1. 한국의 30대(이젠 내가 20대가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었다)가 자라나면서 본 풍경은, 대부분 어머니의 가삿일이었을 것이다. 우리 집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는데, 아버지는 동 시대 사람들에 대비하면 탈권위적이신 분이었고, 오히려 어머니의 발언권이나 권력(?)이 가장 강했지만 가삿일은 어머니의 전담이었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학생운동-노동운동 커플이었던 부모님에게도 가삿일이 여성에게 주어지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로 여겨졌거나, 혹은 (언뜻 말씀하시고는 했는데) 어머니가 나와 동생을 많이 사랑하고 함께 있는 것을 좋아하셔서 일수도 있겠다. 아버지는 경제 활동을, 어머니는 가삿일을 전담하는 것을 보면서 나는 자랐는데, 어린 시절부터 그게 조금 불만이었던 것 같다. 어머니의 퇴근 없는 삶에 대해서. 




2. 동생과 내가 대학에 입학하며 자취를 하게 되자 어머니는 종종 주말에 올라와 우리 집 가삿일을 도우시고는 했다. 어머니의 일을 더하기 싫은 나머지 동생과 나는 주말이 되기 전 금요일마다 대청소를 했지만 어머니는 뭔가를 계속 찾아내시고 일을 해주시고는 다시 지방으로 내려가시고는 했다. 멀어지는 어머니의 승용차를 바라보면서 마음이 계속 아팠던 이유 중 하나는 분명 그 주말에 어머니의 휴식시간을 자식들이 빼앗았다는 생각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3. 그래서 나는 일종의 보복으로 종종 집에 내려가면 어머니의 일을 전담하고자 했다. 내가 일 하고 어머니가 쉬는 그런 주말을 꿈꾸었는데, 어머니는 인내심이 부족한 사람이었다. 어머니는 답답해하면서 기다리지 못하셨고, 그래서 결국 같이 하게 되는 날들이 많아졌다. 여전히 어머니는 맘 놓고 쉬시지 못했다. 지방으로 내려간 이후에는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일을 나가시게 되었는데, 어머니의 퇴근은 그 온전한 의미에서 퇴근일 수 없었다.




4.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뒤에, 나는 집안일을 도맡아 하게 되었다. 아버지는 경제 활동에 전념하시면서 경제적 기반 없는 두 자녀를 부양하셔야 했고, 동생의 가삿일 숙련도는 매우 낮았기 때문이다. 자취방이 아닌 '집'의 가삿일이 무엇인지 그때가 되어서 비로소 실감하게 되었다. 끊임없이 몰려들고, 해방이 없으며, 내가 외면하게 될 때에 비로소 끝나는 그 일. 하루하루 반복되는 그 일.




5. 박사논문의 주제가 '집'이라는 공간의 상호관계와 윤리적 성격이라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도 이러한 경험에 근거하는 것 같다. 사랑으로만 해결되지 않는 것들이 있고, 그것들이 곪았을 때 사랑의 존립도 위협받는다. 그러한 고민들이 지금의 나를 구성하고 있다.




6. 요즘 다시 가삿일에 전념하게 된 나는 밑반찬을 고민하고, 균형 잡힌 식사와 부엌의 정리정돈, 화장실 청소와 쓰레기 분리수거, 바닥 걸레질, 미세먼지 마스크 주문, 공기청정기 관리 등을 생각한다. 다행히 빨래는 동생이, 설거지는 아버지가 맡아주었다. 인간은 타인에게 이를 미루지 않는 이상 가삿일에서 도망칠 수 없을 텐데, 이 아이와 잘 살아가는 방법은 끊임 없이 고민해야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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