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의 마지막 날.

2020. 12. 31. 01:36짧은 생각들

2020이란 해는 뭔가 특별한 해가 될 것 같았다.

약간의 강박증 때문이다.

횡단보도 흰 선을 밟아가며 건너고, 딱 떨어지는 숫자들을 좋아하는 내게 2020은 뭔가 아름다운 숫자처럼 보였다. 앞의 두 숫자와 뒤의 두 숫자가 반복되면서도 깔끔하게 딱 정돈된 느낌의 해. 그것이 2019년 말에 내가 갖고 있던 막연한 기대였다. 정말 '모두에게' 불행한 한 해가 될 줄은 몰랐다.

 

코로나 때문에 많은 제약이 생겼다. 코로나가 망가트린 일상을 하나하나 설명하는 것은 이미 많은 이들이 하고 있을테니, 굳이 반복하고 싶지 않다. 코로나 시대에 '잃은' 것이 많지 않다는 것은 감사할 일이다. 건강이든, 돈이든, 일이든(대학원생은 돈벌이 자체가 많지는 않지만. 물론 돈이 되지 않는 일은 많다). 가끔은 몇년 전 진로 고민의 시기에 여행작가를 선택했으면 보다 끔찍한 한 해였을 것이라 생각하면서 안도하기도 한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희망을 조금씩 생각한 해였다. '희망'은 다소 거창하고, 그동안 신경쓰지 않았던 '미래'를 조금씩 준비하게 된 해였다. 그 전까지는, 특히 엄마가 이제 곁에 없게 되고, 그 자리를 채워주었던 사람까지 떠난 이후의 나는 아무런 미래도 생각하지 않았다. 나도 오래 못 살 것 같았고 (이 생각은 여전하지만), 불확실한 미래에 투자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 때 그 때 즐거운 일들을 했다. 성과가 좋지 않아도 금방 잊을 수 있었다. 미래가 없는 이에게 현재의 부진은 사소한 것이니까. 그러다 올해는 뭔가가 회복되었다. 건강검진 이후 운동을 열심히 해서일까? 내가 생각하던 미래보다 훨씬 일찍 삶을 마감할 수 있다는 공포 때문에 운동과 건강에 신경쓰게 되었는데, 그것이 어떤 다른 의욕까지 자극했던 것도 같다. 

 

기대가 없으면 실망도 없고, 희망이 없으면 절망도 없는 법이다. 올해 돌아온 기대와 희망은 나를 조금은 불행하게 만들었다. 지지부진한 나를 돌아보는 것이 조금 괴로워졌고, 올 한 해의 성취가 기껏해야 '좋은 조교' (학생들이 정말 그렇게 느낄까?) 라는 사실이 나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그래도 조금은 힘을 내서, 박사 논문을 위해 이것저것 하기 시작했다. 한 걸음 한 걸음 씩.

 

긍정적인 (것에 가까운) 변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끝나지 않은 문제들이 내년의 나를 기다리고 있다.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어떤 삶이 내 성정에 맞는 것인지에 대한 판단이 아직 서지 않는다. 조금 멀리 보기 시작하니 공부나 연애나 여타의 인간관계들, 그리고 내 앞에 주어진 여러 선택들을 기존과는 다른 방식으로 보게 된다. 이 문제의 '덩어리'를, 올해에는 완전히 풀어내는데 실패했다. 내년에 나는 한 살 더 많아진 시선으로 이 문제를 다시 생각하겠지. (그치만 문제 해결 능력에 그리 큰 변화는 없을 것 같다)  

 

내년은, 별 다른 일이 예정되어 있지 않다. 계획 없는 불행이 다가오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소소한 바람이 있다면, 내년 이맘때 쯤이면 논문의 완성이 다가와 있기를. (소소한가?)

 

30대가 되는 것도 무서웠는데, 어느덧 중반에 가까워 졌다. 34이라는 숫자가 매우 무섭고 무겁지만, 받아들여야 하는 거겠지. (흑흑) 내년의 나, 잘 버팁시다.

 

2020년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