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은 단절이지만 지속이다: 언내추럴

2021. 1. 12. 16:14리뷰

 

 

0. 

 

그렇게 좋아하던 배우는 아니었는데, 어쩌다 보니 이시하라 사토미 출연작들을 찾아 정주행하는 요즘이다. 운동할 때나 쉴 때 한 에피소드 씩 틀어놓고는 하는데, '교열걸'에서 캐릭터 소화력과 내 취향인 목소리 톤에 감동받고는, 곧바로 '언내추럴'을 시작했다. 주변인들에게 추천받기도 했던 작품인데, 미루고 미루다가 이제 보게 되었다. 지금은.. '안본 눈 삽니다'의 상태가 되어버렸다.  

 

 

1. 

 

일단 장점이 많은 드라마다. 일단 '믿고 보는' 각본가 노기 아키코의 작품이어서인지 스토리도 탄탄하고 대사들도 좋다. ('중쇄를 찍자'도 매우 좋았다) 왓챠의 많은 리뷰들이 지적하듯이 젠더감수성, 여성이 처한 사회적 환경의 문제도 잘 다루고 있다. 메세지가 너무 노골적인 작품은 작품이라기보다는 캠페인 느낌이 나서 좋아하지 않는데, 문제들을 세밀하게 드러내 다루면서도 과하지 않아서 좋았다. 캐릭터들도 다들 매력적이었고, (물론 두 남자 캐릭터들은 조금 밉상이거나 답답한 스타일이어서 완결 근처에 와서야 정이 들었다. 한편 고독한 미식가 아저씨는 무해하고 책임감 있는 중년 남성 역할로 독보적인 배우인 듯.) 큰 줄기가 있지만 그 외의 작은 에피들도 단지 큰 줄기를 위해 이용되지 않고 각각의 이야기가 있어 좋았다. 이런저런 특징들은 많은 블로그 리뷰들이 지적하고 있어 굳이 자세히 적지 않고, 왜 이 작품이 '내게' 좋았는지를 적고자 한다.

 

 

2.    

 

스토리 전반을 관통하는 소재는 '죽음'이다. 주인공들은 법의학자들의 연구소인 UDI(Unnatural Death Investigation) 라보 소속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고, 거기에는 단절이 있다. 이들은 죽은 사체를 부검하고 현장을 검사하여 사망의 원인을 진단하고 판정하는 것을 주 임무로 한다. 이 '원인'이라는 것은 직접적인 요인(독이나 자상이나 등)뿐 아니라 상황 조건, 용의자까지 포괄한다. 곧, 겉으로 볼 때 이는 법의학 수사물인 셈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 작품이 주목하는 것은 '삶'이다. 어떤 이의 죽음이 있고, 남겨져 있는 사람들이 있다. 남겨진 사람들은 여전히 살아가야한다. 죽은 이를 마음에 품고, 그의 몫까지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인 셈이다. 이들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물론 그 일상은 이전과 동일한 일상은 아닐 것이나) 죽음의 원인을 찾고, 납득하거나 정리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를 알 수 없게 되면 그것은 남은 이들을 평생 괴롭히는 고통이 된다. 끝없는 물음과 끝없는 고통, 그로 인한 일상의 무의미. 드라마에서 보여주는 것은 법의학팀이 이처럼 남겨진 이들에게 답을 주고, 그들을 다시 삶으로 돌려 보내는 위로의 과정이다. 이 '답'의 과정은 범인이 응당한 대가를 치루는 것을 필연적으로 포함하지 않는다. 범인이 책임을 질 수 있는 상황이라면 물론 책임이 물어져야 하겠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다. 동일본 대지진의 경우, 건물에서 우연히 일어난 화재가 주민들을 집어 삼켰을 경우. 남은 이들은 '누가 그랬는지' 외에, '이 일이 왜 일어났는지' 또한 납득해야 한다. 이 이유를 제공해주는 것이 법의학의, 법의학자로서의 '위로'인 것이다. 

 

이시하라 사토미가 분한 미스미 미코토는 어린 시절 어머니의 선택으로 목숨을 잃을 뻔했다. 소위 '동반 자살'의 생존자다. (미코토는 동반 자살은 단지 범인도 함께 죽었을 뿐이라며 이 표현을 거부한다. 필자도 늘 이를 이상한 표현이라고 생각해왔다. 이 표현에는 범인 자신이 부당하게 가진 생사여탈권이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비극에도 비현실적으로 건강한 멘탈을 가진 미코토는, 왜 자신의 어머니가 모두를 죽음으로 내몰려 했는지 알 수 없다. 영원히 그럴 것이다. 죽은 어머니는 말이 없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녀는 이를 "'납득'은 아니지만 '정리'"한다. 이제 더 이상 그 사건에 물음을 던지지 않는 것이다. 반면 남주인 나카도 케이는 8년 전 살해당한 애인을 직접 부검하는 운명에 처하고, 그 이후로 범인을 추적한다. 나카도 케이는 누가 왜 그녀를 죽였는지에 대한 끊임없는 물음으로 고통받지만, 최후에는 이 고통에도 마침표를 찍게 된다.

 

 

3. 

 

죽음은 남겨진 이들에게 물음의 사건이다. 경우에 따라 이는 빠르게 자문자답되기도, 혹은 남겨진 자도 함께 떠날 때까지 지속되기도 한다. 이 단절 앞에서 물음표만 남게 되는 것은 비극이다. 이제 6년이 다 되어 가는데, 엄마가 내 곁을 떠날 때 나는 비슷한 생각을 했다. 어머니의 1주기 때 쓴 글이다. (leereszimmer.tistory.com/14?category=711893) 왜 이 죽음이 우리 곁에 왔는지 나는 한참을 이해하지 못하고,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공부를 거의 1년 쉰 것도 이 때문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직접적인 원인에 대해서 나는 알고 있었다. 어머니는 췌장암 말기로, 간에까지 전이되셔서 거의 손쓸 틈 없이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돌아가시기 한달 쯤 전에는 계속 병상에만 계셨고, 나는 엄마 손을 자주 잡아드리는 것 외에는 다른 무엇으로 어머니의 고통을 덜어드리지 못했다. 내가 계속 물었던 것은 왜 이 일이 도대체 왜 우리에게 일어났는가 하는 것이다. 왜 암이었는지, 왜 하필 췌장이었는지, 왜 발견이 늦게 된 것인지. 일종의 운명론적인 물음이었다. 

 

나는 아직 그 운명을 납득하지 못한다. 어머니는 내 삶에서 매우 큰 존재였고, 나의 사랑이었고 나의 멘토였으며, 나의 위안이었다. 철없는 시절이 끝난지 얼마 되지 않아 주어진 이별이었기 때문에 내게는 아직 후회가 많이 쌓여 있다. 그러나 나는 언제부터인가 이미 일어난 이 사건을 '정리'했다. 아직 이해는 되지 않고, 납득하고 싶지 않지만, 나는 운명을 거슬러 올라갈 수 없다. 나는 뒤를 돌아볼 수는 있어도 뒤로 걸어갈 수는 없는 인간이니까. 어머니는 아직 슬픔의 표상이지만 이제는 절망스럽지 않게 되었다. 어머니의 죽음이 가진 필연성에는 명시적인 답이 주어지지 않았지만, 그럴 수 없는 문제들도 있다는 것을, 나는 조금은 받아들이게 되었다. 드라마에서 나타난 많은 죽음, 그리고 삶을 보면서, 몇년 전의 나를 다시 생각했다.

 

 

4.

 

남은 이들은 살아가야 한다. 어쨌든 삶은 우리 앞에 놓여져 있다. 죽음은 물음을 던지고, 답은 남은 이들에게 위로가 된다. 동시에, 우리는 죽은 이를 마음에 두고 살아가야 한다. 내 한 걸음은 죽은 이와 함께 걷는 두 걸음인 셈이다. '언내추럴'이 내 옛 기억을 다시 꺼내 조용히 울린 이유다.  

 

공부가 잘 되지 않아서 늘어지거나 의욕이 없을 때 종종 생각한다. '엄마에게 부끄럽지 않게 살자.' 나는 우연히 살아남았지만, 내가 살아가는 것은 필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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