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생각들

불편함은 죄가 없다.

빈, 2017. 1. 7. 01:29

2016년 6월 2일.


불편함은 죄가 없다

“프로불편러”라는 표현이 있다. 사실 이는 좀 재미있는 표현이다. “프로-”는 “불편함”과 아무 관련도 없는 단어다. 불편함은 직업이나 기술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아마추어불편러”도 없다) 그럼에도 두 단어를 결합시키고 “-er”를 붙여 “프로불편러”라고 사용하는 것은 참신하다.
그런데 이 참신한 표현이 사용되는 지점은 전혀 참신하지 않다. 이 표현은 누군가가 타자의 입을 다물게 하려는 고전적이고 진부한 상황에 사용된다. 자신이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은 지점을 문제시할 때 어디선가 튀어나오는 표현이다. ‘나는 즐거운데 너는 왜 불편해하고 그러니? 너가 불편해서 내가 충분히 즐겁지가 않아.’ 조금 지난 표현을 가져오자면 이는 “선비질”의 2016년 버전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물론 불편함이란 일차적으로 주관적인 감정이다. 주관적인 감정에서 곧바로 도덕적인 옳고 그름을 추출하는 것은 부당하다. (나는 과거에 어이없는 일을 겪고는 트위터에 “불편하다고 해서 부정의한 것은 아니다”라는 글을 쓴 적이 있다.) 그런데 이러한 불편함이 주관적인 감정이라고 해서 단지 일상적인 사소함으로 간주되어서는 안된다. 불편함은 부정의를 느끼는 정의감의 다듬어지지 않은 표현이기도 하다. 다듬어지지 않은 직관에서 우리는 부정의를 불편해한다. 혹은 ‘당신이 옳지 않다는 것은 알지만 그것을 따지고 싸우고 싶지 않아요. 그러나 당신이 뭘 했는지 한번 쯤 다시 생각해봤으면 해요’의 완곡한 표현일 수도 있다.
편하다는 것은 우리가 무의식적 의식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기존의 이해 방식에 부합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우리가 불편함을 느끼는 그 파열에서 많은 변화들이 시작된다. 불편하다는 점에서 그것이 도덕적인 잘못이라는 점이 곧바로 도출되지는 않는다. 불편함은 그것을 공적인 문제로 만드는 해석 틀을 통해야만 비로소 도덕적 문제가 된다. 그러나 불편함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지나쳐온 것들, 낄낄거리며 비웃었던 것들을 반성해봐야 한다는 신호다. 이는 만연한 무시, 모욕, 비하, 혐오들을 감지하는 가장 직관적인 계기다.
“선비질”이라는 표현이 선비가 가졌던 모습들을 ‘꼰대질’만 남기고 사상했다면, “프로불편러”라는 표현은 주관적 감정이라는 점만 강조하며 타자의 입을 막는다. 불편함은 죄가 없다. 불편함은 구제되어야 한다. 나는 프로불편러로 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