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생각들

추모의 권리

빈, 2020. 7. 11. 01:00

 

1.

 

인권변호사의 꿈을 품었던 적이 있다.

 

아마 어머니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인권변호사라는 이름을 가진 이들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해서 사회적 약자들, 어떤 권력들에 억눌려 법 앞에서조차 평등하지 않은 이들을 도왔던 것이 내게는 매우 옳고 추구할만한 일 같아 보였다. <전태일평전>을 쓴 조영래 변호사가 첫 번째 롤모델이 되었지만 일찍 작고하신 탓에 나는 그의 생생한 삶을 글로만 체험할 수 있었다. 그는 이미 역사가 된 사람이었다. 그 다음 내 눈에 들어온 것은 박원순이었다.

 

존경이라는 말이 내게는 너무 거대한 언어라서, 나는 누군가가 존경하는 사람을 물어보면 쉽게 대답하지 못한다. 부모님이나 다른 좋은 사람들이 있지만 나는 이들을 닮고 싶어하지 '존경'한다고 하지는 못했다. 존경은 현실의 삶을 사는 이들에게는 사실 조금 거창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대신에 나는 '롤모델'을 가슴에 품고는 했다. 위대하지는 않지만 본받을 점이 있는, 내가 가고 싶은 길을 먼저 가는 사람들. 인권변호사를 꿈꾸던 내게 박원순은 롤모델 같은 사람이었다. 인권에 관심을 갖게 되고, 나중에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일하면 좋겠다 생각하고, 참여연대에 기웃거리게 된 것은 대부분 그의 영향이었다.

 

어느덧 나이를 먹고, 꿈이 바뀌면서,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게 되었지만, 그렇게 미워하지도 않았다. 어느 날 시장 후보가 되었다 했을 때, 사실 의아했다. 정치가 그에게 어울리는 자리인가? 하는 의구심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서울 시장은 선출직 중에서도 매우 높은 위상을 갖는 자리니 말이다. 내게 박원순 변호사는 '이사장' 같은 직함을 달고 있어도 순박하고, 서민적이고, 남 위에 군림하지 않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래서 어울리지 않는다 생각했다.

 

세 번의 시장직을 거치면서, 썩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종종 '쇼맨십'을 발휘해서 '왜 저럴까...' 부끄러워지기도 했고, 공원, 텃밭 등에 대한 집착이나 서울시인권헌장의 좌절 등 기대에 못 미치는 부분들이 있었다. 실질적으로는 모르겠지만 '시민'이라는 말을 앞에 놓는 사업들을 많이 했다는 점은 시민운동가 출신에게 기대했던 바와 합치하는 것이었다. 기대 이하였지만 소외된 이들에 대한 지원이 많이 있기도 했다. 이제서 돌아보면 그럭저럭 괜찮은 시장이었던 것 같다.

 

 

2.

 

그를 추모할 수 없게 될 줄은 몰랐다.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 같다. 불명예스럽게 퇴진할 수도 있겠지, 여느 정치인들이 그렇듯이, 라고는 생각했었다. 이제는 그를 추모하는 것이 비도덕적, 부정의한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휩싸인다.

 

황망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그가 마지막으로 택한 것 또한 일종의 가해였다. 그는 내가 아는 정치인 중에 가장 젠더 이슈에 민감한 사람이었다. 스스로 많은 싸움을 해 왔고, 그것이 변호사 박원순을 인권변호사로 만드는 데 일조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이 걸어온 길을 스스로 부정해 버리고, 마지막까지 믿고 싶지 않았던 사실로 나를 떠밀었다. 어제는 스트레스가 심해 몸에 두드러기가 났다. 살면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한 때 나의 롤모델이었던 사람은, 그리고 내가 세 번이나 표를 주었고, 내게 그럭저럭 괜찮은 시장이었던 사람은, 서울의 얼굴이었던 사람은 그렇게 오명을 남기고 떠났다.

 

추모할 수 없는 이별은 두 배로 슬픈 법이다. 그리고 슬퍼하는 것조차 도리에 어긋나는 그러한 슬픔은 또 다시 두 배로 괴로운 것이다. 나는 시장 박원순을 추모할 수 없다. 

 

나는 변호사 박원순만을 기억할 것이다. 부당함에 싸우던 사람, 세상을 더 좋은 곳으로 만들겠다던 그 사람만 기억할 것이다. 권력을 잡으면 사람이 변한다는 상투적인 말을, 지금은 받아들이고 싶다. 자신의 잘못을 참회하고, 다른 피해자가 더 나오지 않게, 다시 예전의 운동가로 돌아가는 것은 그에게 정말 어려운 일이었을까. 

 

황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