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보다가 엄마 생각을 했다.
책을 보다가 엄마 생각을 했다. 엘리자베트 벡-게른스하임, <모성애의 발명>을 보다가, 엄마 생각을 했다.
나는 어린시절부터 마마보이였다. 엄마 껌딱지였다. 사실 대부분의 경우 어린 시절에는 엄마가 전부인 시기를 보낸다. 내 경우는 그게 조금 더 길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은 탁하고 혼재되어 있어서, 지금 떠올려보면 명료하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내가 기억하는 몇 가지 조각들, 유치원 시절 죽음이 싫다며 엄마 품에서 울었던 기억, 초등학교 시절 엄마와 산책을 하거나 장을 보러 가거나 분당 정자동에 있던 버거킹에 간다며 동생과 셋이 걸어서 갔던 기억 등등은 조금 생생하다. 평범한 일상이었던 것이 추억으로 남아 있어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조금 더 기억이 생생한 시기는 아마 내가 성장해 조금은 반성능력을 갖추었을 때일 테다. 각 가정마다 부모와 자녀 관계는 천차만별이겠으나, 엄마는 나를 독특하게 키웠다.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느끼고 경험하고 생각하게 하신 것과 동시에, 엄마는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이야기들을 내게 화두로 던졌다. 우리 주변의 삶들이 어떤 것인지, 소외받은 이들을 왜 구제해야 하는지 등등의 문제들을 나와 토론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대학 시절부터 학생운동을 하셨던 엄마는 아마 그런 양육 방식에 매우 만족하셨을 것 같다. (다만 엄마는 내가 덜 급진적이어서 조금 아쉬워 하셨다) 처음 철학을 공부하기로 했던 것도 엄마와의 대화 속에서 내가 갖게 된 문제의식 때문이었다. 세상에는 힘든 사람들이 왜 이리 많을까?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근본적인 문제에 접근해야한다. 철학을 공부하자! 하는 중2 시절의 결심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이렇게 되었다.) 엄마는 내게 생각하는 능력과 생각의 배경을 만들어준 나의 첫 번째 스승이다.
그러나 조금 더 근본적으로, 내가 공부를 생각하게 된 것은 다른 지점이다. 물론 그것도 엄마의 존재가 큰 부분을 차지한다. 나는 조금 더 자라나서, 내가 근본적으로 무엇인가를 바꿀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기웃거리던 학생운동에서 완전히 이탈한 것도 이 시점이었다. 다만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조금이나마 더 행복하기를 바랐다. 그런 세상에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살게 하고 싶었다. 그리고 1순위는 우리 엄마였다. 그것이 내가 철학을 선택하고 공부를 지속하게 했던 동기부여였다. 물론 엄마와 사이가 좋기만 했던 건 아니다.사춘기 때는 매우 버릇없는 아이였고, 여리지만 동시에 불같은 엄마는 참지 않았다. 말로 엄마에게 준 상처도 많다. 다행히 군대를 다녀와서는 (따로 살아서 그랬던 것일까?) 엄마에게 사랑만 줄 수 있었다. 애인은 바뀌었지만 엄마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으로 굳건했다.
내 동기부여가 엄마의 존재에 근거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엄마가 우리 곁을 떠난 후 공부에 집중할 수 없었다. 물론 여러가지 이유들이 더 있었지만. 나를 많이 사랑했지만 인정하는 것에 서툴렀던 엄마에게 나는 정말로 인정받고 싶었다. 이제 그것은 가능하지 않게 되었다. 몇 년이 지나 나는 다시 마음을 잡을 수 있었지만 그리 단단한 확신은 아니게 되었다. (물론 엄마가 이 글을 보신다면 핑계대지 말라고 혀를 끌끌 차시겠지만)
박사논문 주제는 사랑, 가족, 여성, 행복한 삶과 같은 키워드들이 버무려지는 테제다. 가족 안에서, 특히 여성과 같이 불리한 이들은 어떻게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다. 이것 또한 엄마가 어릴 적부터 내게 뿌린 씨앗에서 자라난 것일 테다.